항일 독립운동가 여천 홍범도장군(洪範圖, 1868~1943)의 삶은 사실 한평생 고난의 연속이었다. 조실부모한 가난한 평민으로 태어나 그가 마주한 세상은 매우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했던가? 하지만 본성이 정의롭지 않았다면 영웅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살아가며 마주치는 부패한 군인, 지주, 자본가들과 싸웠고 마침내 제국주의의 야욕과도 당당히 맞선 전설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다.
젊은 홍범도! 머슴에서 중으로 사냥꾼으로 떠돌이 생활...
홍범도는 1868년 평양 서문 안에 있는 문렬사 부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홍윤식은 증조부가 홍경래와 가까운 일가로 ‘홍경래난’이 실패한 뒤 평양으로 도망쳐 와 살았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던 아버지와 결혼한 고아였던 그의 어머니는 홍범도가 태어날 때 산고로 죽었다. 그의 아버지는 심봉사처럼 어린애를 안고 집집을 다니면서 동네 젖을 먹여 키웠다. 그러나 그가 아홉 살 때 그의 아버지마저 죽었다. 그는 가난한 숙부 집에서 자랐으며 조금 커서는 떠돌이생활을 하다가 머슴살이를 했다.
그의 나이 15세 때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평양에 지역방위군인 진위대를 설치했다. 홍범도는 17세 이상이라는 규정을 두 살을 속이고 지원해 합격했다. 그는 진위대에 배치되어 취고수(나팔수)로 3년 동안 복무하다가 탈출했다. 젊은 홍범도는 단조로운 군생활에 만족을 못하고 새로운 세계로 도망쳐 나온 것이다.
그 뒤 황해도 수안의 조지청에서 일꾼 노릇을 했다. 그런데 임금을 제 때에 주지 않고 종처럼 혹사만 시키자 화가 난 그는 주인을 때려눕히고 3년 만에 다시 도망쳐 나왔다. 결국 그는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에 있는 신계사를 찾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의 방황이 이렇게 끝나는가 했지만 그에게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비구니 이옥녀와 열애를 한 끝에 임신을 시킨 것이다. 그는 이옥녀와 해로하기로 결심하고 함께 처가가 있는 함경도 북청을 향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멈추지를 않았고 원산 부근에 이르러 건달패에게 이옥녀를 탈취당하고 말았다. 만삭의 몸인 그녀는 간신히 풀려나 천신만고 끝에 고향인 북청으로 갔으나 그녀가 죽은 줄 알았던 홍범도는 상심한 마음을 안고 세상을 떠돌았다.
다시 유랑생활을 하던 중 하루는 강원도 희양 군 덕패장터에서 예사롭지 않은 사냥꾼을 만났다. 그는 사냥꾼을 따라 태백산 밀림에서 수렵생활로 나날을 보내면서 담력을 키웠고 호랑이를 잡는 따위 무술을 익혔다.
그러던 중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했고 청일전쟁도 일어나자 그는 산중생활을 청산하고 일본 타도에 앞장서기로 작정했다. 홍범도는 늙어서 옛 일을 회고하면서 “일찍이 갑오년 농민이 폐정개혁과 외세척결을 기치로 기의(起義)할 때 나는 처음으로 반일 반봉건 의식이 싹터 여기에 뛰어들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동학농민전쟁을 주도한 전봉준이 처형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분기했고 다음 해 민비 살해사건의 소식을 듣고는 반드시 일제에 복수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마침내 의병장이 되다!
1895년 8월 홍범도는 황해도 서흥에 사는 김수협을 만나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몰아내자는데 뜻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철령을 근거지로 삼기로 합의했다. 철령은 원산에서 서울로 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통로였다. 무엇보다 무기가 필요하여 때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이곳을 지나가는 일본군 12명으로부터 처음으로 장총과 탄약무기를 탈취했다. 무기를 안변군의 마을로 옮긴 이들은 의병 40여 명을 모집해 안변 석왕사를 거쳐 철원 보개산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마침 남쪽에서 올라온 유인석 의병부대 100여 명과 합류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의병들은 모조리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고 김수협이 전사하고 말았다. 첫 번째 맛본 패배였다.
홍범도는 황해도 연안의 한 금광으로 피신하여 금광에서 일을 하던 중 일본군 기병 3명을 때려눕히고 탄약 300발과 양곡 등을 탈취했다. 또 홍범도는 덕원읍에 탐관오리인 좌수 전성준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일본돈 8,480원을 빼앗고 그를 끌어내 교외에서 처단했다. 다시 평안도 양덕으로 도피한 뒤 일본인, 친일파, 부정한 벼슬아치와 부호를 찾아내 처단하고 재산을 빼앗아 나누어 주는 등 3년 동안 단독으로 활동을 했다. 말하자면 의적을 자부하며 떠돌이 의협생활을 한 것이다.
홍범도는 이후 북청으로 와서 수렵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우연히 이옥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헤어진 지 7년 만에 상봉한 것이다. 이옥녀는 그의 7세 된 아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7년 동안의 떠돌이생활을 끝내고 가정을 꾸려 7년 동안 살면서 둘째 아들도 두었다. 이때 그는 화전과 사냥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명포수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이 7년을 회고하면서 가장 안정되고 평온한 생활을 누렸다고 했다.
다시 반일투쟁에 나서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홍범도는 삼수, 갑산 등지에서 반일투쟁에 나섰다. 1907년에 들어 일제는 우리 민중의 무장항쟁을 억누르고자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했다. 일본의 국경수비대는 백두산 일대 포수들의 무기를 회수하거나 검거하기도 했다. 이해 11월, 홍범도는 태양욱, 차도선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포수들을 집결시켰다. 이들은 후치령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공격하고 우편마차를 탈취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군을 유인하여 섬멸하기도 하고 군용 화물차를 습격하기도 하면서 갑산, 혜산진, 삼수, 풍산 일대를 교란했다. 이렇게 해서 의병 1천여 명을 모아 군량도감 등 부대의 진용을 갖추고 격문 포고문을 돌리면서 약 3년 동안 게릴라 전법으로 37회의 전투를 벌였다. 의병들은 구식 군대를 영입하고 대포와 탄약을 자체 생산했다. 일제는 성진의 군대까지 동원했으나 맞대응하기가 어려워지자 회유와 귀순 공작을 폈다. 결국 차도선은 귀순공작에 넘어가고 태양 욱은 함정에 걸려 체포당하고 말았으며 일제는 끊임없이 홍범도 귀순공작을 압박했다.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부는 홍범도 귀순공작의 한 방법으로 그의 가족을 잡아들였다. 일제는 이옥녀에게 남편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라고 압박했으나 그녀는 끝내 응하지 않다가 모진 고문을 받아 구류소에서 죽었다. 그의 큰아들 용범은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으며, 그의 작은 아들 용환은 살인범으로 몰려 고문을 받은 뒤 폐병으로 연해주에서 죽었다.
홍범도는 극심한 가정의 비극을 겪으면서도 계속 반일투쟁의 고삐를 놓지 않았지만 무기가 턱없이 부족했던 의병들은 강력한 일본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갔다. 그는 청나라와 러시아의 탄약 지원교섭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1908년 10월 동지 세 사람과 함께 압록강을 넘고 길림을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들어갔다.
당시 연해주의 조건도 아주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본군은 러시아정부에 강력하게 항일의병을 저지해 달라는 요구를 해왔고 러시아정부는 이 요구를 물리칠 힘이 없어 조선인들이 연해주에서 벌이는 의병활동을 막는 조치를 취했다. 일제 경찰은 그의 행방을 쫓은 끝에 연해주에 있음을 알아내고 계속 추적해 왔다.
홍범도는 1909년 6월 무렵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소식을 듣고 다시 포수들이 모여들어 북청, 갑산, 혜산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인석이 편지를 보내 격려하면서 역량을 키우라는 권고를 했다. 1910년 3월 무렵 홍범도는 정예부대를 조직, 장백현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둔전을 일구며 농사를 지어 군량미로 공급하기도 하면서 연해주, 만주 그리고 국내 의병들과의 연계를 모색했다. 그의 활동무대는 1919년 정식 독립군을 창건할 때까지 국경 일대에서 게릴라 전법으로 전개되었고 일본군과 경찰 그리고 국경수비대는 홍범도를 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으나 끝내 그를 잡지 못했다.
봉오동전투의 대승리!
1919년, 독립운동은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3·1 운동에 힘입어 각지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재정비되거나 새로이 조직되었다. 북간도에서도 용정과 훈춘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장백현에서는 천도교도들이 일본헌병대를 습격했다. 홍범도는 안도현 명월진에서 종래의 의병과 포수를 모아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고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홍범도는 독립군을 이끌고 혜산진과 갑산의 일본군을 습격했다. 이어 백두산에 근거지를 두고 두만강 연안인 자성, 강계, 만포진, 회령 등지에 있는 일본군영과 경찰관서를 공격했다. 이제 독립군은 예전과는 달리 대한독립군의 이름으로 고유문을 각지에 보내고 경찰과 보조원에 대의를 밝히며 성장해 갔다.
드디어 결정적인 시기가 왔다. 그동안 홍범도부대의 활약에 자존심은 짓밟힌 일본군은 홍범도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봉오동을 전면 공격했다. 1920년 6월 7일 이 골짜기에서 네 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피가 냇물을 이룬 뒤에야 정적을 되찾았다. 결과는 홍범도의 대승이었다. 적 사살 157명, 중상 200여 명의 전과를 올렸는데 아군은 불과 15~16명의 전사자만을 냈던 것이다. 이것이 청산리전투의 서막이다.
청산리전투와 독립전쟁의 의의
봉오동전투에서의 패배로 일제는 독립군이 만만치 않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일본군은 새로운 음모를 꾸몄다. 일제의 음모는 이른바 훈춘사건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중국의 비적에게 훈춘시내를 약탈하도록 사주하고 이것을 조선 독립군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웠다. 만주 땅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하는 구실을 만든 것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경신(庚申, 1920년) 대토벌작전이라고 한다. 이때 독립군 총병력은 1,950명, 일본군 총병력은 7,000여 명이었다.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白雲坪) 전투를 시작으로 청산리와 어랑촌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소수의 독립군은 뛰어난 전술로 무수한 화기를 지닌 일본군을 농락했다. 6일간의 일본군 전사자가 1천254명이었으며 부상자를 합하면 인명피해가 3천여 명에 이르렀다. 독립군의 전사자는 200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역사에서 말하는 청산리전투이다.
봉오동과 청산리전투는 승리를 떠나 전투 자체로 우리 민족에게는 큰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의병이나 독립군이 일제와 무력항쟁을 벌일 때 가장 절실하게 소망했던 것은 ‘교전당사국의 인정’이었다. 조선은 일제와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다 보니 의병이나 독립군은 독립전쟁으로써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없었다. 따라서 교전당사국으로 인정해 줄 것을 국제적으로 호소했으나 ‘국내에서 일정 기간 일정 지역을 점령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등의 요건을 들어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런 현실에서 홍범도의 활동상은 바로 교전당사국 인정에 하나의 사례로 제시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활동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그의 군사활동은 우리의 의병, 독립군 할 것 없이 가장 장기간에 걸쳐 가장 큰 전과를 올린 경우에 해당된다. 또한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그나마 고개를 들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영웅은 사라지지 않는다...
봉오동,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북간도 일대의 우리 동포들을 마구 죽이고 마을을 불태워 초토로 만들었는데 이 경신대참변으로 3천5백여 명의 동포가 참살을 당했으며 체포된 숫자는 5천여 명, 50여 개 학교가 불에 타 사라졌다.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머나먼 이국땅에서 독립군과 동포가 겪었던 어려움과 고난의 역사는
함부로 평가하기조차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일본군의 공세에 대항하기 어려웠던 독립군은 그 근거지를 러시아 땅 흑하(黑河, 자유시)로 옮겼다. 당시 레닌은 한국독립군에 협조적이었으나 일본군이 침공을 빌미로 위협을 가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볼셰비키는 일본군이 철수조건으로 한국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하자 대한독립군단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장해제를 반대하는 독립군을 공격해 46명이 사망하는 내부 갈등까지 유발되었다. 이 혼란 속에서도 홍범도는 중립을 지켜 사망사건을 재판하는 악역을 자처하며 자신이 끌고 와 이제는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독립군 식솔을 위해 끝까지 노력한 것이다.
이후 김좌진, 이청천 등은 다시 만주로 나왔고, 홍범도는 남은 독립군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의 러시아 땅에 영영 주저앉았게 되었다. 그리고 홍범도는 이국땅에서 자신이 끌고 온 식솔들을 위해 레닌을 만나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고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하며 버텨왔으나 1937년, 스탈린정권이 들어서자 연해주 일대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홍범도도 그곳으로 이주하여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재혼한 아내와 함께 여생을 꾸려 나갔다. 그는 집단농장 관리인 일도 하고 극장의 경비원 일도 맡아보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동포의 집에 유숙할 때 동포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루 이상을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노 영웅은 이렇듯 초라한 만년을 보내며 1943년 해방을 2년 앞두고 이국땅에서 쓸쓸히 묻혔다.
홍범도장군은 가난뿐만 아니라 커서도 자신의 이름정도 외엔 제대로 된 문장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배우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홍범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목격담이 전해 온다. 비록 배우지는 못했어도 그의 인간됨과 따뜻한 마음, 올바른 개념이 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경신년 7월 초순(음력) 어느 날 저녁 홍범도는 일을 다 보고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와 툇마루에 앉아 잠깐 쉬었다. 내가 방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보자 홍범도는 나를 오라고 손짓했다. 내가 옆으로 가 앉으니 이름은 무엇이고 공부를 하느냐고 묻기도 했고 나의 청을 쾌히 들어주어 전투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때 나의 또래들이 많이 모여와 울타리 밖에서 자기들도 함께 이야기를 듣게 해달라고 눈짓, 손짓을 했다. 홍범도의 호위병이 “너희들은 돌아가거라”라고” 하자 홍범도는 “그 애들을 들여놓아라. 우리가 잘살자고 피 흘려 싸우느냐? 다 저 애들의 앞날을 위해서이지”라고 했다. 홍범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애들은 환성을 울리며 뛰어들어와 함께 들었다. 홍범도는 로투구령을 넘다가 왜놈 수색대를 족치던 전투 이야기를 했는데 쑥대가 움직이는 곳을 겨누어 쏘기만 하면 한 놈씩 뻐드러지곤 했다고 신나게 말했다. - 양환준의 기록. 연길 김택(金澤) 씨의 《청산리전투에서의 홍범도 장군의 주도적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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